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(문단 편집) === 출생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=== 1892년 [[헝가리 왕국(오스트리아)|헝가리 왕국]]의 [[수도(행정구역)|수도]] [[부다페스트]]에서 태어났다. 아버지는 유명한 헝가리 귀족이었고, 어머니는 프랑스인 교사였다. 16세 때 가출하여 프랑스 육군 [[프랑스 외인부대]]에 지원했으나 연령 미달로 입대가 거부되었다.[* 생전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외인부대에서 1년간 군복무를 하던 중 소식을 듣고 찾아온 가족들에 의해 만 18세 이하 입대연령 미달사유로 의가사 전역 조치되었다고 한다. (파비안 몽클라르, <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: 나의 아버지 몽클라르 장군>, (사)한국에너지법연구소, 2013, 99페이지.] 이후 그는 당시 프랑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교 예비과정으로 1년간 육군 병으로 군 복무를 하고, 1912년 사관학교에 입교, 1914년 육군 [[소위]]로 임관했다. 임관 후 그는 프랑스 육군 제14사단 60보병연대 소대장으로 [[제1차 세계 대전]]에 참전해 소대장 부임 이틀만에 전사한 중대장을 대신해 중대를 지휘했다. 부임 9일 만에 전투 중 부상으로 후송되는 것을 시작으로 전쟁 중 모두 7차례 부상을 입고 수많은 훈포장을 받았다.[* 그는 52년 간의 군복무 중 18종의 프랑스 훈포장을 41회 수상했고, 외국에서 수여받은 훈포장도 17종에 달한다.]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[[대위]]로 진급했다.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제1모로코 척후병 연대(1er régiment de tirailleurs marocains (RTM)) 참모로 근무했고, 관측기 조종 훈련을 받기도 했다. 1924~1927년까지는 제3외인 보병연대에서 근무하고, 1928년 소령으로 진급했다. 1930년 제16샤쇠르 대대(16e bataillon de chasseurs)에서 근무하고, 1931~1941년까지 제2, 3, 4, 5외인 보병연대에서 근무했다. 1938년 중령으로 진급했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 초기인 1939년~1940년 사이에 프랑스군의 몇 안되는 승리였던 1940년 [[나르비크]] 전투(Land battles at Narvik)에서[* 노르웨이 프랑스, 폴란드 연합군의 나르비크 전투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노르웨이 전역에서 연합군의 패전으로 종결.] [[프랑스 외인부대|제13외인 경산악반여단(13e DB.L.MLE)]](2개 대대 규모)을 지휘했다. 1940년 6월 노르웨이 전역에서 연합군이 패전한 후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노르웨이에서 철수했다. 이때 13외인여단의 절반은 영국으로, 절반은 프랑스로 철수했다. [[나치 독일]]에 대한 프랑스의 항복이 임박하자 1940년 6월 9일 영국으로 망명한 [[샤를 드골]]은 1940년 6월 18일 호소문을 통해 프랑스인의 망명과 저항을 촉구했다. 노르웨이에서 500명의 부대원과 함께 6월 16일 프랑스 브르타뉴에 도착한 그는 6월 19일 프랑스 브르타뉴의 Saint-Jacut-sur-Mer 항구에서 배를 타고 브르타뉴 앞 바다의 영국령 [[저지 섬]]으로 망명했다가 6월 21일 영국으로 철수한 13외인여단과 합류하여 드골의 [[자유 프랑스|자유 프랑스군]]에 가담한 첫번째 고위장교가 되었다.[* 생전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노르웨이에서 철수하여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3일 동안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부대에 가입했다고 하는데, 당시는 아직 레지스탕스 부대가 생기기 전이라 신빙성이 없다. 본인의 주장은 파비안 몽클라르, <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: 나의 아버지 몽클라르 장군>, (사)한국에너지법연구소, 2013, 196페이지, 221페이지에 한 줄씩 언급된다.] 그는 보복을 우려해 '랄프 몽클라르'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나, 비시 프랑스 군사법원은 반역행위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.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한 공로로 1940년 대령으로 진급한 후 자유 프랑스 동방여단(Brigade Française Libre d'Orient)장으로 취임, 1941년 이탈리아령 [[에리트레아]]에서 벌어진 케렌 전투(Battle of Keren)에 참여하기도 했다. 케렌 전투는 영국 [[중동사령부]] 산하 수단주둔군(2개 인도사단, 자유프랑스 동방여단)과 이탈리아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[[이탈리아]] [[해군]] [[대장(계급)|대장]]을 포함해 1만 4천 명의 적군을 생포하고 마사우아항을 점령한 전투이다. 이후 그는 1941년 장성 진급 후 동지중해 지역 최고사령관을 지내다 종전을 맞이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